알리바바 그룹의 前 대표이사이자 회장. 2019년 기준 마화텅과 함께 중국 부자 투톱. 포브스 표지에 최초로 실린 중국의 사업가이기도 하다.
고등학교를 다닐 때부터 영어가 능숙했다. 마윈은 '크레이지 잉글리시'로 유명한 리양(李揚)의 '두려움을 떨쳐버리라'는 말을 가슴에 품고, 만나는 외국인마다 말을 걸었다. 당시 그가 살던 곳은 항저우에서 외국인이 가장 많은 시후(西湖)다.
1982년 고등학교에 졸업했지만 대학입시에 실패하고 곧바로 취업을 시작했다. 원래는 호텔 종업원을 노렸는데, 작은 키 때문에 퇴짜를 맞았다. 그렇게 몇몇 직종을 전전하면서 다시 대학입시에 도전했지만 수학 때문에 떨어졌다. 삼수생 때도 수학 때문에 전문대에 겨우 들어갈 실력이었지만, 마침 결원이 생긴 덕분에 운 좋게 항저우 사범대학에 들어갔다. 옛날부터 능숙한 영어 실력 덕분에 성적도 언제나 5등 이내였다. 항저우 사대에서 학생회 주석으로 뽑혔고, 항저우 학생연맹 주석에도 올랐다.[5] 항저우 사대 1학년 때 만난 장잉과 결혼했다.
1988년 항저우 전자과학기술대학 영어 강사로 들어갔다.[6] 당시 학생들의 회상에 의하면 강좌가 매우 재미있어서 공연을 보는 듯한 기분이었고, 기초가 약한 학생도 영어에 흥미를 느꼈으며 다른 반 학생이 호기심에 보러 올 정도였다고 한다. 그러나 당시 항저우 전자과학기술대학 영어강사는 박봉이었고, 마윈이 드러낸 영어 실력이면 과기대 영어 강사보다 훨씬 많은 돈을 거머쥘 수 있었다. 하지만 당시 항저우 사대 학장이 '네가 교수를 한다고 약속해놓고 그만두면 네 후배들 앞날까지 막힌다. 월급이 적어도 5년만 버텨달라.'고 청원해서 딱 6년 반을 버티고 다른 대학으로 옮겼다. 밤에는 다른 야간대학에서 영어를 가르쳤고, 그때 무역 업계 사람들과 얼굴을 익혔다. 알리바바 창립 멤버 18명 중에서, 몇몇은 마윈에게 강의를 들었던 학생이다.
1992년 강사 생활을 하면서 하이보(海博)라는 이름의 통역 회사를 통해 첫 번째 기업 경영을 시작했고, 그러면서도 1995년까지 교직에 있었다. 이 해에 항저우 10대 우수 청년 교사에 선정되었지만, 풀타임으로 창업을 하겠다며 안정된 교직을 그만뒀다.
1995년 미국에 방문했다가 친구를 통해 인터넷을 처음 알게 되었다고 한다. 그는 맥주라는 단어를 인터넷으로 검색해보았는데 다른 나라들의 자료는 눈에 보였는데도 중국과 관련된 자료는 하나도 찾을 수가 없었다고 한다. 이 일을 계기로 인터넷의 잠재력을 눈여겨본 그는 같은 해에 중국 최초의 인터넷 기업인 차이나옐로우페이지(中國黃頁)를 세웠다. 1995년에 2만 7천 위안의 자본금으로 세운, 홈페이지를 만들어주는 회사였지만, 당시에는 중국에 인터넷이 아직 그다지 유명하지 않았기 때문에 사기꾼으로 생각하는 사람도 적지 않았다고. 쉽게 말해서 이 사람이 너무 시대를 앞서나간 거다. 게다가 베이징에는 외국 기업들이 자금력을 내세워 경쟁이 되지 않았고, 고향인 항저우에 내려갔더니 경쟁 상대였던 '항저우전신'이 자금력으로 압박했다.[7] 1996년 3월 항저우전신과 합병하기로 하였으나, 경영 의견에 대한 차이가 있었고, 자본과 권력에서 밀리는 마윈이 사퇴하기로 결정되었다.
야후 창립 멤버인 제리 양의 스카우트 제의를 거절했으며 이는 창업에 대한 열망이 강했기 때문이다.
1997년 중국 대외경제무역부에서 인터넷 네트워크 업무를 담당했는데, 차이나옐로우페이지 시절의 동료들을 데리고 가서 해낸 것이다. 대외경제무역부는 온라인 서비스를 제공하는 중국 최초의 정부부서였고, 베이징에 '중국 국제전자상거래센터' 회사를 세우고 마윈에게 조직관리를 맡겼다. 하지만 마윈은 공공기관 특성상 경영에 대한 규제와 간섭이 너무 심하다고 생각했다. 처음 약속은 30% 지분을 주겠다고 했지만, 실제로는 '현행법상 불가능하다'라는 이유로 매우 적은 월급만 주었으며, 정부 관료들은 간부와 외부인 사이에 거리두기를 원했으며 복종, 독점, 통제만을 원했다. 성과가 항저우를 떠들썩하게 했지만, 모든 성과는 대외경제무역부 간부들의 이름으로 발표되었으며 마윈이 그걸 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마윈 혼자 홀대를 받았다면 참았겠지만 마윈과 함께 일하던 창업멤버들도 나쁜 대우를 받았다. 그래서 1999년 회사를 관두고 알리바바 창업멤버들과 함께 항저우로 떠났는데, 마윈이 그만두자고 하자 5분만에 전원이 동의했다고 한다.
당시 돈만 따져보면 상당한 실패였으나, 대신 14개월치 경험을 얻었다. 중소기업을 위한 전자상거래 B2B 모델에 대한 마윈의 구상은 이 시기(1998년 말경)에 나온 것이다. 영어강사를 할 때는 국제 무역 시장, 생산업체-수출입업체 관계에 대해 몰랐다.
1999년 1월 B2B 전자상거래 기업인 알리바바를 설립했다. 알리바바라는 사명을 선택한 이유는 거의 모든 국가의 사람들이 알리바바를 알고 있고 천일야화에서 묘사된 알리바바의 착한 성품이 긍정적인 브랜드 이미지를 형성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캐나다의 어떤 기업이 알리바바닷컴의 도메인을 선점하고 있었으나 1만 달러에 소유권을 이전받게 된다.[8] 50만 위안 자본으로 45평짜리 마윈 자택에 모여 18명의 창업 멤버가 하루 17시간씩 일한 끝에, 1999년 3월에 홈페이지가 완성되었다. 물론 현실은 참담했고 1999년 7월경에는 마윈이 빚을 내서 인건비를 줘야 할 지경에 이르렀다. 그럼에도 마윈은 다른 기업들에게 벤처 투자를 받을 때, 자기 회사가 너무 저평가되었다는 이유로 그것들을 38차례나 거절했는데, 첫 벤처투자 조건이 추가적인 투자 유치를 결정짓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마침내 8월경 골드만삭스로부터 500만 달러를 투자받았다. 골드만삭스는 미국 유명 기업이다 보니 브랜드 가치가 있을 것 같다는 판단이었다.[9]
2000년 소프트뱅크의 손정의 회장은 마윈을 직접 만난지 단 6분 만에 투자 결정을 내렸다. 투자를 위해 기업가들의 프레젠테이션을 듣는 자리였는데, 마윈에게 설명할 20분의 시간이 주어졌지만 손정의가 듣다가 6분만에 말을 끊어버리고 투자를 결정했다. 손정의는 3천만 달러를 제안했지만, 마윈은 이를 거절하고 2천만 달러의 투자금을 받았다. 이 2천만 달러는 후에 알리바바가 상장되면서 578억 달러가 되어 3000배의 대박을 냈다.
2001년 알리바바는 손익분기점을 넘겼고 적자를 벗어났다.
중국인 최초로 포브스 표지 모델이 되었다.
2003년 C2C 거래 기업 타오바오를 설립했다. 결제 시스템인 알리페이도 출시했다.
2005년 야후 차이나의 경영권을 인수하고, 야후로부터 10억 달러의 투자금을 받았다.
2006년 경쟁자 eBay를 수수료 무료를 무기로 중국 시장에서 퇴출시켰다.
2007년 홍콩 주식 시장에 상장했다.
2013년 홍콩의 명문대인 홍콩과기대에서 명예박사학위를 받았다.
2014년 뉴욕 주식 시장에 상장했다.
2017년 2월, 알리바바 호주/뉴질랜드 지사를 설립하기 위해 호주를 방문하면서 호주 뉴캐슬 대학교에 2천6백만 호주달러의 장학금을 기부하고 마-몰리 재단을 설립했다. 기부와 장학재단 설립 이유는 1985년 호주 뉴캐슬에 거주 하던 켄 몰리 씨의 초청으로 호주를 방문하고 약 한달간 뉴캐슬에 체류했는데, 그때의 경험이 지금의 자신을 만들었다고.
2018년 9월 8일 은퇴하겠다는 외신 보도가 떴다. 기사에 의하면 이후에는 평소의 좌우명인 "50대에는 후배들을 가르쳐줘야한다"라는 걸 실천하기 위해 교육에 힘을 쏟겠다"라고.# 그러나 하루만에 알리바바 측이 마윈 회장 은퇴설을 부인하면서 10일 그룹의 승계 계획을 발표할 것이라고 보도했다.#
2018년 9월 10일 알리바바에서 인터넷으로 성명을 냈다. 마윈 회장이 2019년 9월에 이사회 의장직을 사퇴하고 현 CEO인 장융(張勇)[10]이 회장직을 이어받는다고 밝혔다.# ## 이 같은 결정에 세간에서 '중국 정부로부터 사퇴 압박을 받은 것이 아니냐'는 말이 나왔으나 "은퇴는 내가 10여년 전부터 준비하고 자발적으로 내린 결정이다. 중국 정부 관계자는 오히려 나에게 미쳤냐면서 건강상의 문제 등으로 사퇴하는 거냐고 끊임없이 물어봤고 나는 모두 '아니'라고 대답했다. 정치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고 말하며 정부 개입설을 부인했다.#
그런데 월스트리트 저널에 따르면 단순한 은퇴 정도가 아니라 아예 그룹의 소유권을 포기한다고 한다.#
중국 내에서는 알리바바 그룹 소유 빅데이터를 정부와 공유하라는 중국 정부의 방침 때문에 정부와 상당한 마찰이 있었고 이때문에 그만둔다는 소문도 있는데, 중국 사정상 확인되지 않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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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을 보면 알겠지만 얼굴상이 상당히 독특하다. 이에 외모가 자신을 똑 닮은 가난한 소년을 도와주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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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대의 사기꾼인 엘리자베스 홈즈를 빌 클린턴과 같은 자리에서 찬양했던 흑역사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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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윈은 사람들이 가난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이유로 의지, 선견지명, 용기의 부족을 꼽은 후 “30∼40세가 될 때까지 이룬 것이 없어 멸시를 받더라도 누구도 동정해주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마윈의 어록 정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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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탈하며 부패하지 않은 청년 기업가 이미지를 구축하고 있었는데 2015년에 영국에서 귀족처럼 사냥을 했던 사실이[11] 들통나 다른 얼굴을 가졌다며 비난당하기도 했다.
영국 귀족이 되고 싶은듯 여왕에게 뇌물주면 주지 않으려나가면 쓴 공산당원
마윈과 견자단이 나오는 공수도 예고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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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극권 애호가로 알려져 있다. 기업 경영에도 태극권의 원리를 강조할 정도. 2017년에는 이연걸 감독의 《공수도(功守道)》란 태극권 영화에 주연으로 출연했다. 이 영화에는 이연걸 이외에도 홍금보, 견자단, 스모 요코즈나 출신 아사쇼류까지 출연했다. 하지만 정식으로 도장가서 사사한 게 아니라 독학으로 익힌거라서 무술가로 치긴 어렵다. 마지막 장면에서 화산파라는 3글자를 보고 쳐들어가서 도장 깨기를 시전했는데 안에서 경찰들이 나와서 연행되었고, 알고보니...출소라는 뒷글자가 나무가지와 잎에 가려져 있었다는 엔딩이다[13]. 대체로는 권력에 머리 숙이겠다는 메세지를 포함한 것으로 해석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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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아하는 작가는 김용이다. 실제로 마윈 회장은 공식 석상에서 여러 차례 김용과 그의 무협소설에 대한 애정을 드러낸 바 있다. 마윈은 앞서 지난 2016년 2월 24일 김용의 92세 생일을 축하하는 동영상을 직접 제작해 타오바오 크라우드펀딩(淘宝众筹)에 올리기도 했다. 축하 영상에서 마윈은 “김용의 무협 정신은 나와 알리바바 기업 문화에 깊은 영향을 줬다”며 “창업 초창기, 알리바바 창시자 18명 중 16~7명 모두가 김용의 무협소설을 매우 좋아했다”고 말했다. 이어 “김용의 소설은 상상력과 낭만주의, 의협심이 풍부하다”며 “특히 정의를 실현하는 의협 정신은 나와 알리바바에게 거대한 영향을 주었다”고 강조했다. 마윈 회장의 김용 무협소설을 향한 애정은 알리바바 사옥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현재 마윈의 사무실은 무협소설 색채가 가득한 ‘도화도(桃花岛)’로, 회의실은 ‘광명정(光明顶)’으로 불리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또한 회의실 내부에는 김용이 친필로 직접 쓴 문구 ‘못에 가서 물고기를 탐내는 것보다 물러나서 그물을 뜨는 편이 더 낫다(临渊羡鱼,不如退而结网)’가 걸려 있다. 이 밖에도 알리바바 직원들은 모두 무협 또는 판타지 소설에 나올 법한 닉네임을 갖고 있다. 마윈 회장은 김용 무협소설 ‘소오강호(笑傲江湖)’ 속 고독한 검객 ‘펑칭양(风清扬)’을 자신의 닉네임으로 지은 것으로 알려졌다. 또한 평소 마윈 회장은 김용 무협소설 속에 등장하는 문장을 자주 인용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앞서 마윈은 지난 2014년 김용을 직접 만났던 추억을 회상하며 그에 대한 각별한 애정을 드러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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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에서는 관우를 위협하는 재물의 신으로 떠오르고 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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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4월, 996 근무[14]가 사회적 이슈로 떠오르자 SNS에 996 근무를 옹호하는 취지의 글을 올렸는데 영락없는 열정페이식 발언이라 논란이 되었다. 심지어 중국 관영매체들까지도 나서서 이 주장을 비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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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하이에서 이루어진 일론 머스크와의 대담에서 A.I.가 인공지능(Artificial Intelligence)이 아닌 알리바바 지능의 약자로 사용되었으면 좋겠다고 조크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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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저우 헝다 타오바오의 공동구단주이며 가끔씩 경기장에서 자기팀을 관전하는 모습이 카메라에 잡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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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일보 특집 인터뷰에서 빅 데이터로 계획경제가 우월해질 것이라고 한 바 있다. 일부 혐중 네티즌들은 독재정부를 옹호하는 것이라고 주장하는데, 실제로 이런 주장은 미래학자들이 많이 하고 있다. 자본주의 본진인 영국의 파이낸셜 타임즈에 기고한 미래학자들도 # 비슷한 전망을 한 바 있다. 다만 소련 등 현실사회주의 국가들에서 사이버신 계획 등 정보기술을 이용한 계획경제 운용 시도를 한 것에서 영향을 받았을 가능성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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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윈은 친정부적인 행보를 보이고, 공개적으로 여러 번 공산당을 찬양하고 있다. 이것을 비판적으로 보는 견해도 있지만, 재벌들이 정부에 순응적인 것은 비단 중국의 일뿐만이 아니다. 중국은 사회주의 독재 국가이기 때문에 재벌들이 정부 비위를 거스르면 당장 피해를 보며, 심지어는 자산이 몰수되고 해체될 수도 있다.[12] 마윈은 정부기관에도 몸을 담고, 중국 정부에게 많은 도움을 받았으므로 여러가지로 정부에게 잘 보여 자신의 지위를 안정적으로 유지하려고 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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