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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슈

수지 김 피살사건 내용 전개

▲수지김 사건

 


1987년 대선을 앞두고 단순살인사건인 '수지김 사건'을 여간첩사건으로 조작했다. 1987년 1월 3일 수지김은 홍콩에서 남편 윤태식에 의해 살해되었다.

윤태식은 아내를 살해한 뒤 처벌이 무서워 월북을 기도하였다. 당시 안기부는 그 사실을 알면서도 납북미수사건으로 조작하였다. 즉 살해된 수지김은 위장 결혼하여 남편을 북한으로 납치하려다 피살된 북한공작원 수지김 간첩사건으로 발표되었다.

 

1976년일본인 현지처시절 수지 김(사진/신동아)



수지 김(본명 김옥분)의 남편 윤태식은 1987년 1월3일 새벽 돈 문제로 심하게 다투는 과정에서 부인 김 씨를 살해한 뒤 자진월북을 결심하고 홍콩을 떠나 다음날 북한대사관이 있는 싱가포르에 도착했다. 북한대사관을 찾은 윤씨는 입북의사를 밝혔다가 거절당하자 다시 미국대사관으로 찾아가 망명의사를 밝혔지만 한국대사관으로 신병이 넘겨졌다. 

 

윤씨는 대사관에서 안기부 요원 등으로부터 조사를 받으며 "아내는 북한 공작원으로 그와 함께 조총련계 공작원들에 의해 납북될 뻔했다가 탈출했다"고 거짓 진술을 했다.

안기부는 윤씨의 주장에 따라 싱가포르에서 납북미수 기자회견을 개최하려고 했지만 "윤씨의 말을 믿을 수 없다"고 판단한 대사관측이 이에 완강히 반대하자 태국방콕으로 윤씨를 데려가 그 해 1월8일 현지에서 1차 기자회견을 강행했다.

1월 9일 김포공항에 도착하여 다시 같은 내용의 기자회견를 한 뒤 윤 씨는 안기부 남산분실로 연행되어 홍콩을 떠난 이후 행적을 집중적으로 추궁 받자 다음날 새벽 "사실은 내가 아내를 살해하고 처벌을 피하기 위해 자진월북을 시도했다"고 실토했다. 



윤씨 납북미수 기자회견이 언론을 통해 알려지자 싱가포르 주재 북한대사관측은 같은 달 10일 "윤씨는 자진월북을 위해 대사관에 온 적이 있으며 납북미수가 아니다"는 성명을 발표했고, 이에 싱가포르 주재 한국대사관에서는 훈령에 따라 "납북미수가 맞다"며 반박성명을 내기도 했다.

 

그러나 장 전 안기부장은 당시 이런 사실을 보고 받고 남북관계 등을 고려해 진상발표를 보류하라는 지시를 내렸고, 안기부는 기자회견을 주선하는 과정에서 윤씨에게 싱가포르 주재 미국대사관에 들렀던 사실까지 숨기도록 지시한 것으로 드러났다.

이후 4개월간 안기부에서 조사를 받았던 윤씨는 살인, 납북미수, 폭행치사 등 3가지 경우에 대한 시나리오를 숙지하는 교육까지 받은 것으로 밝혀졌다. 홍콩주재 외사협력관 조모 경정은 2001년 1월28일 수지 김 가족들의 제보에 따라 홍콩 현지에서 취재를 벌이던 SBS 취재팀을 만나 "윤씨가 부부싸움 중 김씨를 살해했는데 납북미수사건으로 조작됐다는 의혹이 있다"는 얘기를 전해 듣고 보고서를 작성하여 당시 경찰청 외사관리관이던 김모 치안감에게 보냈다. 

 

보고내용에는 "홍콩경찰이 수지 김의 유력한 살해 용의자로 윤씨를 지목하고 있으며 사법공조조약에 따라 한국 측에 관련증거 일체를 제공하겠다는 의사를 밝혔다"는 내용이 포함돼있었다.   

 

 

이에 따라 김 치안감은 1월29일 경찰청 외사분실에 사건을 배당하고 내사토록 지시해 사건발생 13년 만에 수지 김 피살사건에 대한 경찰내사가 시작됐다. 비슷한 시기 같은 정보를 입수한 김승일 당시 국정원 대공수사국장도 이를 엄익준 당시 2차장(작고)에게 보고했지만 "이 사건이 언론에 보도될 경우에 따른 국제문제, 남북문제, 국가정보원의 위상문제 등을 고려, 기존 방침대로 단순살인사건임을 발표하지 말고 보안을 유지하라"는 지시를 받았다. 



국정원은 이어 경찰이 2월14일 윤씨에 관한 조사기록 열람을 요청함에 따라 경찰의 내사사실을 알게 됐고, 엄 전 차장은 "사실이 밝혀질 경우 국제적으로나 북한에게 망신을 당할 수밖에 없지 않느냐, 이무영 경찰청장을 만나 수지 김 사건을 설명하고 수지 김 사건이 공개되면 곤란하다는 뜻을 전하라"고 김 전 국장에게 지시했다.

이에 따라 김 전 국장은 다음날 오전 10시께 이무영 당시 경찰청장을 방문, "국정원 방침상 자료제공은 힘들다. 윤씨가 87년 처를 살해하고 이를 대공 사건으로 몰고 갔기 때문에 언론에 공개되면 외교 및 대북문제에 상당한 영향을 미칠 수 있다"며 사건내막을 설명했다. "사건을 묻어 달라"는 김 전 국장의 요청을 받아들인 이 전 청장은 다음날(2월15일) 김 전 치안감을 불러 수지 김 사건을 국정원에 넘겨주라"고 지시함으로써 수지 김 사건에 대한 내사는 중단되고 말았다. 
간첩 조작사건인 ‘수지김 사건’과 관련, 국가는 수지김 유가족에게 45억 7,000만원을 배상했다. 이후 국가는 당시 사건을 은폐ㆍ조작한 장세동 전 국가안전기획부장과 윤태식을 상대로 구상금 소송을 제기해 각각 9억원과 5억5,000만원의 지급 판결을 받아냈다.

 

사건일지

- 1987년 1월 3일 윤태식, 홍콩 카오릉(九龍) 지역의 아파트에서 수지 김 살해
- 1987년 1월 8일 윤태식, 안기부 주관으로 싱가포르에서 기자회견 갖고 '북한 공작원 수지 김과 싱가포르 주재 북한대사관이 나를 북한으로 납치하려 했으나 탈출했다'고 밝힘
- 1987년 1월26일 홍콩 아파트 침대 매트리스 밑에서 수지 김의 시체 발견
- 2000년 1월 주간동아, 수지 김 살해 사건에 대한 의혹 보도
- 2000년 2월 SBS, 사건의혹 보도하며 윤태식을 살인범으로 추정
- 2000년 3월 수지 김의 가족, 수지 김은 북한 공작원이 아니고 윤태식이 살해한 의혹 있다며 서울지방검찰청에 고소
- 2000년 5월 검찰, 홍콩 경찰에 사건기록 요청
- 2000년12월 검찰, 홍콩에서 사건기록 넘겨받음
- 2001년 3월 검찰, 윤태식에 대해 소환 통보했으나 불응
- 2001년10월 주임검사, 홍콩에 가서 사건 조사
- 2001년10월24일 검찰, 윤태식을 살인과 사기 혐의로 긴급체포
- 2001년10월26일 윤태식 구속
- 2001년11월13일 윤태식 기소

 

 

 

그렇다면 김옥분의 가족들은 그후 어떻게 됐을까.

물론 '간첩 가족'이라는 낙인이 찍힌 뒤 온 가족은 풍비박산이 났다. 노모 김성순 씨는 사건 당시 안기부에 끌려가 욕설과 구타를 당한 뒤 화병으로, 오빠 김만식 씨는 술로 화를 삭이다 교통사고로, 공무원이던 언니 김옥녀 씨는 직장에서 쫓겨나 정신병을 앓다가 한많은 세상을 떴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막내 동생 김옥님 씨는 시댁의 구박을 받다가 이혼을 당했으며, 어린 조카는 학교에서 왕따를 당하다 1년을 버티지 못하고 중학교 2학년 무렵에 중퇴하고 말았다.

우리는 지금까지 이 사건의 전말을 살펴보면서, 우리 사회에서 북풍(北風)이니 총풍(銃風)이니 하는 사건들이 왜 자꾸 생겨나는지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많은 독자들은 반공 혹은 반북 이데올로기와 관련된 문제라면 집단적으로 이성이 마비되고 합리적 반론조차 용납하지 않는 우리 사회의 구조적 문제가 본질적 원인이라는 생각도 했을 것이다.